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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포 대기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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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덴포 대기근은 1833년 홍수와 냉해로 인한 대흉작으로 발생한 일본의 대기근이다. 주로 혼슈 북부 지역에서 심각한 피해가 발생했으며, 125만 명 이상의 인구가 감소했다. 쌀값 폭등과 식량 부족으로 농민 봉기가 빈발했고, 덴포 소동과 오시오 헤이하치로의 난의 원인이 되었다. 각 번은 의창 정비와 구황식 안내서 배포 등의 노력을 기울였으며, 덴포 대기근은 도쿠가와 막부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리는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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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포 대기근
개요
이름덴포 대기근 (天保の大飢饉)
로마자 표기Tenpō no daikikin
발생 시기에도 시대 후기
시기덴포 연간 (1833년 ~ 1837년)
주요 피해 지역일본 전역 (특히 도호쿠 지방)
원인냉해, 잦은 자연재해, 병충해
결과기근, 전염병 만연, 사회 불안, 농촌 피폐
사망자 수 추정수십만 명 ~ 100만 명 이상
배경
사회 경제적 상황에도 시대 후기, 막부의 재정 악화, 농촌 경제 불안정
기상 이변덴포 연간, 이상 기후 지속 (냉해, 홍수, 가뭄 등)
농업 생산성품종 개량 미흡, 비료 부족, 생산 기반 취약
원인
기상 요인냉해 (1833년), 장마, 태풍, 홍수, 가뭄
생물학적 요인메뚜기 떼 창궐, 병충해 확산
사회 경제적 요인쌀 가격 폭등, 영세농 몰락, 빈부 격차 심화
전개 과정
1833년냉해로 인한 흉작 시작
1834년 ~ 1836년기근 심화, 전염병 확산 (특히 홍역, 콜레라)
1837년오사카에서 오시오 헤이하치로의 난 발생, 사회 불안 고조
막부의 대응
초기 대응구휼미 지급, 가격 통제 시도
문제점탁상행정, 부정부패 만연, 효과 미미
사태 악화구휼미 부족, 쌀 가격 폭등, 민심 이반
민중의 삶
식량 부족초근목피로 연명, 아사자 속출
전염병위생 상태 악화, 전염병 만연, 사망자 급증
사회적 혼란도적 떼 창궐, 폭동 발생, 사회 질서 붕괴
영향
경제적 영향농촌 경제 붕괴, 상업 활동 위축, 물가 상승
사회적 영향사회 불안 심화, 막부 권위 실추, 개혁 요구 증대
정치적 영향막부의 쇄국 정책 비판, 개국 요구 증가, 메이지 유신의 간접적 원인
평가와 교훈
역사적 평가에도 시대 최대의 기근, 막부의 무능함 드러냄
현대적 교훈식량 안보 중요성, 재난 관리 시스템 구축 필요성
관련 사건
오시오 헤이하치로의 난덴포 대기근의 영향으로 발생한 농민 반란
그 외전국 각지에서 소규모 폭동 및 반란 발생

2. 원인

덴포 대기근은 복합적인 원인으로 발생했다. 자연재해로 인해 농작물 생산량이 급감했고, 사회경제적 요인으로 인해 피해가 더욱 커졌다.

하위 섹션에서 자세히 다루겠지만, 덴포 4년(1833년) 호우로 인한 홍수냉해로 흉작이 발생했다. 특히 도호쿠 지방(무쓰국데와국)의 피해가 컸으며, 센다이번은 벼농사에 편중된 정책 때문에 피해가 심했다. 덴메이 대기근과 비교해 흉작 대책이 있었기에 사망자 수는 적었지만, 상품 작물 상업화로 농촌 빈부 격차가 커져 가난한 백성들은 더욱 굶주렸다.

도쿠가와 막부는 에도에 구제처를 설치했으나, 구제 대상은 70만 명이 넘었다. 쌀값 급등으로 각지에서 농민 봉기가 빈발했고, 덴포 소동과 오시오 헤이하치로의 난의 원인이 되었다. 오사카에서는 매일 150~200명의 아사자가 발생했다.

교토에서는 가모가와 산조 다리 남쪽에 구원 오두막을 설치해 유민들을 구휼했다.

다하라번의 와타나베 카잔은 《흉황심득서》(凶荒心得書)를 저술, 영주에게 관리 기강 단속과 절약, 민중 구제를 우선해야 한다고 설득해 급여 개혁과 의창 정비로 성과를 올렸다. 요네자와번덴메이 대기근의 교훈을 살려 의창을 정비하고 구황식 안내서를 배포하는 등 사전 조치를 취했다.

덴포 대기근으로 1833년부터 5년간 일본 인구는 125만 2000명 감소했고, 이는 덴메이 대기근에 필적하는 감소폭이었다.[17]

2. 1. 자연재해

덴포 대기근의 주요 원인은 덴포 4년(1833년)에 내린 폭우로 인한 홍수냉해로 인한 흉작이었다.[2] 도호쿠 지방(무쓰국데와국)의 피해가 가장 컸다.[10] 특히 센다이번의 경우에는 벼농사에 편중된 정책을 실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피해가 심했다.[11]

19세기 전반에는 태양 활동이 저조했던 것에 더해, 센다이 번사(藩士)인 하나이 야스나리가 기록한 일기 1835년 4월 항목에, 요즘 해돋이가 붉다는 취지의 기술이 있으며, 일본에서 거의 지구 반대편에 있는 중미니카라과에 있는 코시구에나 화산에서 그해 1월에 일어난 대분화로 인한 햇살 가리기 효과에 의한 기온 저하가 냉해를 악화시켰을 가능성이 지적되고 있다.[10]

50년 전의 덴메이 대기근과 비교하여 흉작 대책이 수립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망자 수는 적었다. 그러나 상품 작물의 상업화로 농촌 빈부 격차가 커졌기 때문에 가난한 백성들이 많이 굶주려야 했다.[13]

기근은 반복적인 해충 발생과 질병 발생으로 더욱 심화되었다.[4] 도쿠가와 시대의 4대 기근 중 하나로 여겨지지만, 일본 인구 통계학자 하야미 아키라는 기근 당시 사망자와 인구 감소가 실제로는 기근 자체보다는 질병 발생에 의해 야기되었다고 주장했다.[5]

도쿄도이타바시구아카츠카의 조렌지에 있는 덴포 기근 공양탑

2. 2. 사회경제적 요인

덴포 대기근의 주요 원인은 덴포 4년(1833년)에 내린 호우로 인한 홍수냉해였다.[2] 도호쿠 지방(무쓰국데와국)의 피해가 가장 컸으며, 특히 센다이번은 쌀 농사에 치우친 정책을 펼쳤기 때문에 피해가 막심했다.[11] 50년 전의 덴메이 대기근과 비교하여 흉작 대책이 있었기 때문에 사망자 수는 적었지만,[13] 상품 작물의 상업화로 농촌의 빈부 격차가 커져 가난한 백성들이 많이 굶주려야 했다.[13]

도쿠가와 막부는 구제를 위해 에도에 구제처를 설치했지만, 구제 대상이 70만 명을 넘어섰다.[13] 쌀값이 급등하자 각지에서 농민 봉기가 빈발했고, 덴포 소동과 오시오 헤이하치로의 난의 원인이 되었다.[13] 특히 오사카에서는 매일 150~200명의 아사자가 발생했다고 한다.[13]

교토에서는 가모가와 산조 다리 남쪽에 구원 오두막을 설치하여 유민들을 구원하였다.

한편, 다하라번에서는 와타나베 카잔이 《흉황심득서》(凶荒心得書)를 저술하여 영주에게 제출하고, 관리 기강 단속, 절약, 민중 구제를 우선해야 한다고 설득하여 급여 개혁과 의창 정비를 통해 성과를 올렸다.[13] 요네자와번덴메이 대기근의 교훈을 살려 의창을 정비하고 구황식 안내서를 만들어 배포하는 등 사전 조치를 취했다.[13]

당시 일본의 추정 인구는 1833년부터 5년간 125만 2000명 감소하였고, 인구 감소폭은 덴메이 대기근에 필적했다.[17]

3. 사회적 영향

덴포 대기근은 1833년의 호우와 홍수, 냉해로 인한 대흉작으로 시작되어 사회 전반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13] 특히 도호쿠 지방(무쓰국데와국)의 피해가 컸으며, 센다이번은 벼농사 중심 정책으로 인해 더 큰 피해를 입었다. 덴메이 대기근에 비해 흉작 대책이 있었으나, 농촌 빈부 격차로 인해 많은 백성들이 굶주렸다.[13] 도쿠가와 막부는 에도에 구제소를 설치했지만 70만 명이 넘는 구제 대상자를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쌀값 급등으로 각지에서 백성 봉기와 타파가 빈발했으며, 덴포 소동과 오시오 헤이하치로의 난이 일어나는 원인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일부 번에서는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노력이 있었다. 다하라번가로 와타나베 카잔은 『흉황심득서』를 저술하여 급여 개혁과 의창 정비를 통해 기근 피해를 줄였다. 요네자와번덴메이 대기근의 교훈을 살려 의창을 정비하고 구황식량 안내서를 배포하는 등 사전 조치를 취했다.

3. 1. 인구 감소와 유랑민 증가

덴포 대기근으로 인해 1833년부터 5년간 일본의 추정 인구는 125만 2000명 감소하였으며, 이는 덴메이 대기근에 필적하는 규모였다.[17] 1834년부터 1840년까지 일본의 68개 지방 중 인구가 증가한 곳은 8곳에 불과했고, 27개 지방에서는 인구가 5% 이상 감소했다.[7]

「에도 후기부터 메이지 전기까지의 연령별 인구 및 출생률·사망률의 추계」에 따르면,[15] 당시 인구는 다음과 같이 변화했다.

연도인구
1833년 (덴포 4년)3,198만 명
1838년 (덴포 9년)3,073만 명
1843년 (덴포 14년)3,177만 명



센다이번의 식량 비축에 의존한 곤궁자들이 주변 번에서 유입되었지만, 장티푸스로 추정되는 역병의 유행도 겹쳐 인구가 크게 감소했다.[16] 굶주림을 피하려 몰래 에조치(현재의 홋카이도)로 건너가는 사람이 나타나 하코다테 방면의 인구가 늘었다.

덴포 대기근은 일본 북부 전역에서 걸인의 수를 증가시켰는데, 이들은 1780년대의 간세이 대기근 때 보았던 걸인들보다 더 무법하고 무질서한 것으로 여겨졌다. 1837년 오노의 촌락 원로들은 절도, 치안 악화, 갈취 및 방화가 급증했다고 보고했다.[6] 1838년 에치젠번은 기존 걸인에게 腰札|koshifuda일본어 형태의 구걸 면허를 발급하고, 다른 번에서 온 새로운 걸인의 입국을 금지하는 제도를 시작했다.[6]

3. 2. 농민 봉기와 사회 불안

1833년(덴포 4년) 호우로 인한 홍수냉해로 대흉작이 발생하면서 덴포 대기근이 시작되었다. 도호쿠 지방(무쓰국데와국)의 피해가 가장 컸으며, 특히 센다이번은 벼농사 중심 정책으로 인해 피해가 심했다. 덴메이 대기근에 비해 흉작 대책은 있었으나, 농촌 빈부 격차로 인해 많은 백성들이 굶주려야 했다.[13] 도쿠가와 막부는 에도에 구제소를 설치했지만, 70만 명이 넘는 구제 대상자를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쌀값이 급등하자 각지에서 농민 봉기가 빈발했다.

덴포 7년(1836년) 6월, 막부직할령가이국에서 대규모 백성 봉기인 덴포 소동이 일어났고, 덴포 8년(1837년) 2월에는 오사카에서 오시오 헤이하치로의 난이 발생했다. 오사카에서는 매일 150~200명의 아사자가 발생할 정도로 상황이 심각했다.[13]

교토에서는 동정부교 조(組) 요리키였던 히라츠카 효사가 가모가와 산조 다리 남쪽에 구원 오두막을 설치하여 유민 구제 사업을 펼쳤다. 이 사업으로 1480여 명의 유민을 구원하고, 그중 974명이 사원에 매장되었다.

한편, 다하라 번에서는 가로였던 와타나베 카잔이 『흉황심득서』를 저술하여 급여 개혁과 의창 정비를 통해 기근 피해를 최소화했다. 요네자와 번도 덴메이 대기근의 교훈을 살려 의창을 정비하고 구황식량 안내서를 배포하는 등 사전 조치를 취했다.

1837년 오노의 촌락 원로들은 절도, 치안 악화, 갈취 및 방화가 급증했다고 보고했다.[6] 1838년 에치젠 번은 기존 걸인에게 腰札|koshifuda일본어 형태의 구걸 면허를 발급하고, 다른 번에서 온 새로운 걸인의 입국을 금지하는 제도를 시작했다.[6]

3. 3. 질병 확산

덴포 대기근으로 일본 북부 전역에서 걸인 수가 증가했는데, 이들은 1780년대 간세이 대기근 때보다 더 무법하고 무질서한 것으로 여겨졌다. 1837년 오노의 촌락 원로들은 절도, 치안 악화, 갈취, 방화가 급증했다고 보고했다.[6] 한 촌락 원로는 모든 부랑자를 추방할 것을 제안했지만, 부랑자들이 더욱 무법해질 것을 우려한 촌락 지사가 이를 거부했다. 도쿠가와 시대 걸인 통제의 일반적인 요소였던 걸인 꼬리표는 덴포 대기근 동안 오노에서 시행되었다. 1838년 에치젠번은 기존 걸인에게 腰札|koshifuda|허리 꼬리표일본어 형태의 구걸 면허를 발급하고, 다른 번에서 온 새로운 걸인의 입국을 금지하는 제도를 시행했다.[6]

센다이 번의 식량 비축에 의존한 곤궁자들이 주변 번에서 유입되었지만, 장티푸스로 추정되는 역병 유행이 겹쳐 인구가 크게 감소했다.[16]

센다이 번의 무츠 영지 군방 인구 (이치노세키 번 제외), 센다이・이치노세키 번 총 인구의 변천

4. 각 번의 대응

덴포 대기근 당시 각 번의 대응은 다양했다. 도쿠가와 막부는 구제를 위해 에도에 21곳의 구제처를 설치했지만, 구제 대상은 70만 명이 넘었다. 쌀값이 급등하자 각지에서 농민 봉기가 빈발했고, 1837년에는 오시오 헤이하치로의 난이 일어나기도 했다. 특히 오사카에서는 매일 150~200명의 아사자가 발생했다고 한다.[13]

센다이번은 신전 개발을 통해 100만 석 이상의 수확량을 확보했지만, 벼농사에 편중된 정책으로 인해 피해가 컸다.[11] 번찰의 신용 하락, 현금 부족, 물가 폭등, 악성 인플레이션 등의 문제가 발생했다.[12] 센다이 번은 상인들에게 쌀을 사오도록 의뢰하고, 오미 상인에게 자금 확보를 요청하는 등 민간에 의존해야 했다.[12] 이후 1845년에 소를 설치하고, 무진으로 쌀 비축 제도를 시작하여 쇼와 초기까지 이어졌다.[12]

교토에서는 동정부교 조(組) 요리키였던 히라츠카 효사가 가모가와 산조 다리 남쪽에 구원 오두막을 설치하여 구원 사업을 펼쳤다. 1837년 정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1480여 명의 유민을 구원하고, 그중 974명이 사원에 매장되었다. 이 모습은 오자와 가가쿠의 『황세 유민 구휼도』에 상세히 그려져 있다.

하지만, 모든 번이 피해를 입은 것은 아니었다. (성공 사례 문단 참조)

4. 1. 성공 사례

다하라 번에서는 가로였던 와타나베 카잔이 스승 사토 노부히로의 사상을 바탕으로 《흉황심득서》(凶荒心得書)를 저술하여 영주에게 제출했다. 그는 관리의 기강 단속과 절약, 민중 구제를 최우선으로 해야 한다고 설파하며 급여 개혁과 의창 정비를 수행하여 성과를 올렸다.[13] 요네자와 번도 덴메이 대기근의 교훈을 살려 의창을 정비하고, 구황식량 안내서인 '가테모노'를 만들어 배포하는 등 사전 조치를 취했다.[13]

5. 덴포 개혁

전국적인 덴포 개혁은 1841년 기근이 끝난 후 도입된 다양한 경제 정책이었다. 그러나 일본 전역의 번들은 기근 말기에 자체 개혁을 시작했다. 미토 번은 도쿠가와 나리아키의 지휘 아래, 포괄적인 토지 조사, 시골 지역으로의 무사 재정착, 에도에 있는 번 다이묘의 종식, 번 학교 설립 등 4가지 주요 개혁을 시행했다.[8]

6. 덴포 대기근의 잔재

도호쿠 지방을 중심으로 기근 희생자를 위령하기 위한 묘총(叢塚, 쿠사무라즈카)이 현재도 남아있다.[14]

6. 1. 언어

주로 동북 지방에서 호쿠리쿠, 산인의 일본해 측이나 긴키에서 시코쿠 등 넓은 지역의 방언에서 "'''텐포나'''" 또는 "'''텐포'''"라는 형용동사·형용사가 사용된다. "대단한", "터무니없는", "엄청난", "어마어마한" 등의 넓은 의미를 나타낸다. 덴포 대기근에 유래되었다고도 하며, 현대까지 말로 남아있는 대기근의 잔재라고 할 수 있다. 드물게는 더욱 강조하는 의미로 "텐메이 텐포나"라고도 사용된다.

돗토리 번에서는 "신년이 신"으로서 이 기근의 비참함이 전설이 되어, 최근까지 전해져 내려왔다.

6. 2. 민간 전승

동북 지방에서 호쿠리쿠, 산인의 일본해 쪽이나 긴키에서 시코쿠 등 넓은 지역의 방언에서 "'''텐포나'''" 또는 "'''텐포'''"라는 형용동사·형용사가 사용된다. "대단한", "터무니없는", "엄청난", "어마어마한" 등의 넓은 의미를 나타낸다. 덴포 대기근에서 유래했다고도 하며, 현대까지 말로 남아있는 대기근의 잔재라고 할 수 있다. 드물게는 더욱 강조하는 의미로 "텐메이 텐포나"라고도 사용된다.

돗토리 번에서는 "신년이 신"으로서 이 기근의 비참함이 전설이 되어, 최근까지 전해져 내려왔다.

도호쿠 지방을 중심으로 기근의 희생자를 위령하기 위한 묘총(叢塚, 쿠사무라즈카)이 현재도 남아있다.[14]

6. 3. 위령 시설

도호쿠 지방을 중심으로 덴포 대기근 희생자를 위령하기 위한 묘총(叢塚, 쿠사무라즈카)이 현재도 남아있다.[14]

7. 역사적 의의

1833년에 내린 호우에 의한 홍수냉해로 인한 대흉작이 덴포 대기근의 주요 원인이었다. 도호쿠 지방(무쓰국데와국)의 피해가 가장 컸으며, 특히 센다이번의 경우 벼농사에 편중된 정책을 실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피해가 심했다. 덴메이 대기근과 비교하여 흉작 대책이 수립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망자 수는 적었지만, 상품 작물의 상업화로 농촌 빈부 격차가 커져 가난한 백성들이 많이 굶주려야 했다. 각지에서 많은 수의 아사자가 발생했고, 도쿠가와 막부는 구제를 위해 에도에 구제소를 설치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쌀값이 급등하자 각지에서 농민 봉기가 빈발했고, 덴포 소동과 오시오 헤이하치로의 난의 원인이 되었다.[17]

한편, 다하라번에서는 와타나베 카잔이 《흉황심득서》(凶荒心得書)를 저술하여 영주에게 제출하였고, 급여 개혁과 의창 정비를 통해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 요네자와번덴메이 대기근의 교훈을 살려 의창을 정비하고 구황식 안내서를 배포하는 등 사전 조치를 취했다.[17]

당시 일본의 추정 인구는 1833년부터 5년간 125만 2000명 감소하였고, 인구 감소폭 규모로는 덴메이 대기근에 필적했다. 당시 에도 시대 후기부터 메이지 전기까지의 연령별 인구와 출산율, 사망률 추계는 다음과 같다.[17]

연도인구
1833년 (덴포 4)3,198만
1838년 (덴포 9)3,073만
1843년 (덴포 14)3,177만


참조

[1] 서적 Voices of Early Modern Japan: Contemporary Accounts of Daily Life During the Age of the Shoguns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20-11-26
[2] 서적 The Nineteenth Century: Cambridge History of Japan, Vol. 5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9
[3] 서적 Land and Lordship in Early Modern Japan https://books.google[...]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9
[4] 서적 Early Modern Japan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3-10-30
[5] 서적 Famine Demography: Perspectives from the Past and Present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2002
[6] 서적 Give and Take: Poverty and the Status Order in Early Modern Japan https://books.google[...] BRILL 2020-10-26
[7] 서적 Cambridge University Library: The Great Collections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8-08-27
[8] 서적 Mito and the Politics of Reform in Early Modern Japan https://books.google[...] Rowman & Littlefield 2022-01-28
[9] 웹사이트 天保の飢饉とは https://kotobank.jp/[...] 2022-04-30
[10] 뉴스 江戸の飢饉、巨大噴火の影 気温低下で凶作、人災も一因 https://www.nikkei.c[...] 日本経済新聞 2022-05-05
[11] 서적 百姓・町人と大名 読売新聞社 1987-05
[12] 웹사이트 災害と仙台 江戸時代・天保の古文書から(3)民の力 有力商人に支援要請 https://kahoku.news/[...] 2021-03-03
[13] 서적 百姓・町人と大名 読売新聞社
[14] 웹사이트 「仙台の『くさむら塚』をさがす」 http://miyachiyokato[...] 2022-04-30
[15] 간행물 江戸後期から明治前期までの年齢別人口および出生率・死亡率の推計 https://ir.lib.shima[...]
[16] 웹사이트 災害と仙台 江戸時代・天保の古文書から(2)飢饉 人心すさみ疫病流行 https://kahoku.news/[...] 2021-03-02
[17] 간행물 江戸後期から明治前期までの年齢別人口および出生率・死亡率の推計 http://ir.lib.shiman[...] 新潟産業大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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